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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나목

책/문장들

by oilbeen 2019. 6. 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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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박완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그 회색빛 고집이었다. 마지못해 죽지 못해 살고 있노라는 생활태도에서 추호도 물러서려 들지 않는 그 무섭도록 딴딴한 고집. 나의 내부에서 꿈틀대는, 사는 것을 재미나 하고픈, 다채로운 욕망들은 이 완강한 고집앞에 지쳐가고 있었다.” -p.18


“어떤 이는 숫제 고독을 천성처럼 타고나서 남보다 신비스럽게 돋보이기도 하고 그렇지는 못할망정 액세서리처럼 달고 다닌다거나 또는 가끔 알사탕을 꺼내 핥듯이 기호품의 일종처럼 음미하기도 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편리한 재간이 없었다.

나는 한꺼번에 여러 사람, 여러 가지를 좋아하며 그중 한 사람 한 가지에 열중하며 끊임없이 여러 가지를 재미나 하고팠고 실상 나는 그런 속에서 태어나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p.18


“좀전의 충족감이 포말처럼 꺼졌다. 나는 그에게서 소리 없이 밀려나 있었다. 침팬지와 옥희도와 나... 각각 제 나름의 차원이 다른 고독을, 서로 나눌 수도 도울 수도 없는 자기만의 고독을 앓고 있음을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p.66


“그가 자기만의 고독을 아무에게도 나누려 들지 않듯이 나도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나만의 일이 있는 것이다.” -p.66


“그러나 나는 그가 나에게서 무엇을 바라는지 분명히 알고 있지를 못했다. 그가 나와의 더 오랜 입맞춤이나, 더 오래 안아보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못해 줄 것도 없지만 내가 딴 여자들과 다르기를 그렇게도 소원한다면 난처한 노릇이었다. 

사람들끼리 제각기 생김새나 성격이 조금씩 다른 것만큼 꼭 그만큼만 나는 딴 여자들과 다른 뿐인데, 태수가 나한테 바라는 것은 그만큼만은 아닌 모양이니 말이다. 그는 내가 마치 시궁창 속에서 피어난 장미꽃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픈 눈치였고, 나는 그의 간절한 태도를 봐서라도 다소곳이 그런 척이라도 해줘야겠는데 그게 도무지 쑥스럽고 귀찮았다. 결국 나는 서툰 연기를 하면서까지 그의 마음에 들어야 할 까닭이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는 사이의 홀가분함을 한 발자국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p.77


“그 속에 지난날의 순간들 중에서 간추려진 반짝이는 단편들이 훨훨 어지럽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다만 단편일 뿐 서로 아무런 연관성도 없었고, 회상이라기에는 조금도 감상이 섞이지 않은 채여서 나는 그것들을 부담없이 그냥 즐길 수가 있었다. (중략)

난 내 속에 숨겨놓은 그림엽서의 부피가 너무 많은 것 같아 어리둥절했지만 그런대로 즐거웠다. 동심이 그림을 보듯 그것들을 즐겼을 뿐, 그것들을 모아 어떤 이야기를 꾸밀 만큼 나는 어리석지는 않았으니까. -p.81


“그녀도 옥희도 씨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그들은 지금 시름에 잠겨 있기보다는 삶을 멈추고 정지된 시간 속에 고즈넉이 용해되어 있고, 나만 초조한 시간의 흐름에 휩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과 내가 각각 다른 시간 속에 있다는 생각으로 나는 꽃샘추위 같은 으시시한 외로움을 느꼈다. 

(중략)

그녀가 자꾸 까다로운 소리를 할 것 같아 성가셨다. 나는 나와 상관없는 일로부터 놓여나 피곤한 몸을 마음껏 흐느적대며 내 일을 생각하고, 별과 상가의 불빛을 보고, 그 다음은 어둠과 추위에 나를 팽개쳐야 하고, 꼭 나 혼자만 해야 할 일들로 난 꽤나 바쁜 몸이었다.”-p.120-121


「도망하지 않기로 했어요. 내 나라와 내 집에서 내 문제를 피하지 않고 열심히 감당해 보겠어요. 그렇게 사는 게 옳겠죠? 」

「... 」

나는 별수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언닌 끝끝내 내 문제를 물어보지 않는군요 」

「미안해 」

「괜찮아요. 언니는 내 문제에 대해 개입하지 않고도 벌써 내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쳐줬으니까요. 」

나는 적잖이 당혹했다. 내가 누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쳐줄 수 있다니, 그녀 스스로가 그것을 알고 처리했을 뿐인데, 그녀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스스로를 처리할 자유가 있다고 믿기보다는, 윗사람에게 순종했다고 믿는 것이 마음 편한 모양이다.

하여튼 미숙이는 또렷이 알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아마 다이아나 김도, 수잔 정도 스스로의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을 게다. 환쟁이 김씨도 돈씨도, 옥희도 씨도 아마 알고 있을 게다. 나만 빼놓고 저희들 끼리끼리는 다 알고 있을 게다.

나는 미숙이에게 잡힌 손을 빼고 망연했다. 나만이 사람들의 어떤 질서, 대열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내가 도저히 견제할 수 없는 여러 갈래의 많은 <나>의 제멋대로의 아우성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아우성들을 간추리거나 억누를 생각 같은 건 해본 적도 없이 그 아우성들에게 나를 조금씩 나누며 빙빙 어지럽게 맴을 돌고 있을 뿐인 것이다. (중략)

나는 모두, 옥희도 씨를 포함한 모두가 어떻게 살까를 알고 있다는 게 자꾸만 부럽고 불안했지만 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막연하고도 좀 건방지게 들리는 물음 자체가 대단한 철학 용어처럼 난해했다. -p. 148-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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